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갈량의 북벌 (문단 편집) === 번외편: 위의 반격(제갈량의 3.5차 북벌) === 어쩌면 여기서부터는 본격적인 사마의와 제갈량의 맞대결이라고 볼 수 있다. 230년, 제갈량의 공격이 계속되자 위의 대사마 [[조진]]은 촉을 먼저 공격하여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작전을 입안했고, 대군을 동원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 당시 조진은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죽은 조휴를 대신해 대사마 자리에 오른 상태였고, 검을 차고 전각을 오를 수 있는 특혜(劍履上殿)와 입조할 때 이름을 불리지 않을 특혜(入朝不趨)까지 겸한, 명실공히 위나라 군부의 1인자였다. 장수로서의 역량과 군권 최고위직의 위치를 모두 갖춘 숙장의 건의는 조정의 분위기를 바꿀 만한 힘이 있었다. 제갈량은 양동 작전을 펼쳐 곽회를 물리치고 무도와 음평을 점령하여 촉군이 관중과 농서 양쪽으로 향하는 보급로를 확보했다. 이미 1차 북벌 당시 [[조운]]과 [[등지]]를 이용한 제갈량의 의병지계(疑兵之計)에 당한 탓에 촉군의 본대를 기산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있는 조진이 이러한 사태를 묵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에 촉한을 공격하기 위한 위군의 출정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대사마 [[조진]], 대장군 [[사마의]], 정서거기장군(征西車騎將軍) [[장합]] 등 위나라가 보유한 당대 최고의 지휘관들이 모두 동원될 예정이었다. 한편, 촉한은 곧 원정을 올 위군에 대비한 방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제갈량은 해가 바뀌기 전에 이미 군대를 남쪽으로 물리고 면양(沔陽)과 성고(成固) 일대에 축성 작업을 벌여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을 쌓아뒀는데, 이는 몇 년 전 조진이 학소를 시켜 진창성을 보수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로 적의 침공을 상정하고 대비한 행동에 해당할 것이다. 1차 북벌과 진창 공방전까지는 그렇다 쳐도, 228년 말~229년 초의 전역에서 무도와 음평을 빼앗기고도 위군이 계속 수비 태세를 고집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고 제갈량은 예측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중을 기준으로 볼 때 면양의 한성은 북서쪽에, 성고의 낙성은 북동쪽에 있다. 이에 맞춰 위나라 원정군의 배치 또한 조진의 건의대로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관중에서 한중으로 가는 길목의 경우, 야곡을 통해 남진하면 면양과 만나고 자오곡을 통해 남진하면 성고와 만난다. 다만 북형주에서 한중으로 출진하는 사마의의 경우 한수(漢水)의 수로를 통해 북상하게 되는데, 조진전에서는 "사마의는 한수를 거슬러 올라와 남정(南鄭)에서 합류하기로" 계획됐다고 말한다. 이 경우 실질적으로 조진과 사마의가 합류하게 될 장소로는 낙성 인근이 유력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제갈량은 위군이 한중으로 들어오는 유력한 길목 대부분을 차단한 셈이 된다. 한성과 낙성이 축성된 시기로 보아 조진이 원정을 강행했다는 것은 설령 전쟁이 요새를 사이에 둔 공방전의 양상으로 흘러가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거나, 혹은 한중 일대에 펼쳐진 촉군의 방어선이 완전히 굳어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침내 세 갈래로 갈라진 위군은 일제히 진격을 시작했다. 어떤 장수가 어떤 루트를 맡았는지는 기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사마의가 상용의 길목을 통해 한수를 따라 북상한 것은 일치하지만 야곡과 자오곡을 경유한 장수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진전에서는 조진이 자오곡을 통해 남하했다고 하는데, 후주전에서는 조진이 야곡으로 내려왔으며 자오곡을 통해 남하한 장수는 장합이었다고 한다. 자치통감에선 그냥 누구는 자오곡, 누구는 야곡으로 내려왔다고 정리해 버렸다. 어쨌거나 위의 대군이 일제히 한중을 향해 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자 촉군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제갈량은 성고와 성고 인근의 적판(赤坂)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격퇴 준비를 갖췄으며, 한중 주둔군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여겼는지 강주에 있던 이엄까지 소환했다. 강주의 군무는 아들 [[이풍(촉한)|이풍]]을 도독으로 승진시켜 대리케 한 후, [[이엄]] 본인은 2만 명의 군사를 인솔하여 한중으로 올라오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촉한으로서는 전력에 준하는 병력으로 전쟁에 임한 셈이다. 이 전쟁은 촉한에게 큰 위기였지만, 동시에 큰 기회이기도 했다. 멀고 험난한 길을 원정 오느라 지친 위군에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앞으로의 북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손자(삼국지)|손자]]와 [[진군]]이 이 전투 전에 조조마저 힘들어 했던 곳이라며 각기 조예와 조진의 원정 시도를 만류한 근거에서도 드러나듯, 익주의 지세란 다른 사람도 아닌 조조조차 고전케 했던 곳이 아닌가. 위기를 동반한 기회라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다. 동년 9월, 위군은 힘겹긴 해도 그럭저럭 큰 장애 없이 한중을 향해 잘 행군하고 있었다. 수륙 양면으로 진군하던 사마의는 순조롭게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서성으로 진입해 조진과 한중에서 만나기 기다렸다.[* 진서 선제기는 사마의가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朐䏰)에 도착하고 신풍현(新豐縣)을 함락했다. 군(軍)이 단구(丹口)에 주둔하다 비를 만나 회군했다.'라고 쓰고 있는데 문제는 저 구인이라는 곳이 한중이 아니라 파동군 구인현이고 신풍현은 경조의 신풍현밖에 없다. 지명이 틀린게 커서 그냥 차라리 자치통감 말대로 서성에서 거슬러 올라갔다라고 쓴 거 만도 못하게 되었다.] 헌데 남하하는 위군에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위군은 관중과 무위(武威) 양쪽 지역에서 출발하여[* 호삼성은 무위가 촉한을 공격하기 위한 거점으로 보기에는 너무 멀다는 이유로 이것이 무도(武都) 내지는 건위(建威)의 오기가 아닐까 하는 견해를 제기한 바 있다.] 자오곡과 야곡을 통해 내려오고 있었는데, 하루이틀도 아니고 무려 한 달에 걸쳐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잔도가 끊어지고 말았다.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도로가 끊겨버린 난감한 사태에 부딪혀 조진의 계획은 틀어지기 시작했다. 보통은 이때 위나라가 그냥 물러난 것으로 해석되나 실제로는 전투가 있었다. [[하후연]]전 [[하후패]]의 기록에 따르면 황초 연간에 하후패가 편장군이 되었고 230년 가을에 조진과 사마의, 장합이 한중으로 쳐 들어온 자오의 역에서 참전했는데 이때 하후패는 선봉이 되어, 흥세의 위에 당도해, 전곡에 영채를 안돈했으며 촉한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병사를 내어 공격했고 하후패는 녹각 사이에서 몸소 싸웠고, 구원에 힘입어 풀려났다는 기록이 하후연전 [[하후패]]의 기록에 있다. 한중의 책임자는 정서 장군이고 당시의 정서 장군은 강유였으므로 강유는 주요 방어군의 일원으로서 하후패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여름에 장마가 쏟아져 잔도가 끊기고 보급에 문제가 발생하자 조진, 장합, 사마의의 군대는 별 소득 없이 철수한다. 정사 왕기전에서 왕기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자오의 역에서, 병사가 수백 리를 행군하여 긴 비를 만나, 교각이 파괴되고, 뒤의 군량은 썩어, 전군이 핍절했다'고 하며 위나라가 본 손해로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싸움으로 인해 식량이 고갈된 상황에서 싸움을 통한 위나라군의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일 왕기가 이 전투를 두고 [[제갈탄]]의 난 당시 [[문흠]]이 죽은 것과 동급으로 언급하고 있는 만큼 위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해, 그러니까 이 전역 직후에 제갈량은 위연을 강중으로 진출시켜 양계에서 곽회를 대파하여 후방을 안정시킨다. 228년 조휴가 사망한 이래 위 군부의 1인자는 조진이었으나 이 전투 이후 231년 조진마저 사망하면서 드디어 [[사마의]]가 부상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